대한민국에서 27살 여자로 산다는 것. Essay


대한민국에서 27살 여자로 산다는 것은?
-스물 일곱의 마지막 날 뒤돌아보기. (작년 말일날 쓰기 시작했는데, 이제 완성했다.)


1. '라네즈' 아이크림 사러 갔다가, 궁극의 '아이오페' 아이크림을 추천받는 것.
쓰고 있던 라네즈 아이크림이 다 떨어져서 사러 갔는데, 27살이라니까 매장 직원이 '아이오페 레티놀 NX 딥 링클 코렉터'를 권해주더라. 자그마치 8만원짜리! 더 슬픈 건, 도저히 8만원짜리 아이크림을 살 경제력이 없다는 거지. (아이오페는 10년 가까이 3,40대를 위한 주름 개선 기능성 화장품 브랜드 -쉽게 말해 아줌마 브랜드-로 정상을 지켜오다가 작년부터 모델을 이나영으로 바꾸고 타겟 연령층을 낮추었다. 그렇긴 해도 '라네즈'와 '아이오페' 의 갭은 가히 충격적이다.)
'마몽드 에이지 컨트롤', '헤라 에이지 어웨이' 같은 노화 방지 제품 라인의 광고 카피에 혹 하게 되고, 광고인 줄 뻔히 알면서도 '주름', '노화', '탄력', '안티에이징' '콜라겐' 이라는 텍스트 광고에 반사적으로 클릭을 하기 시작.  피지와 여드름은 더 이상 고민축에도 못 낀다.



2. 다이어트를 위해서가 아니라, '골다공증 예방'을 위해 헬스장에 다니는 것.
출근 길, 막 떠나려 하는 버스를 잡기 위해 3분만 뛰면 최소 10분은 자리 앉아 숨을 골라야 한다. 계단이나 오르막길에서는 숨이 차고, 때때로 호흡곤란까지 온다. 늘 백을 메는 오른쪽 어깨는 조금만 피곤해도 결리기 일쑤. 앉았다 일어날 때에는 '에구구' 소리와 함께 허리를 잡고 일어나야 하며, 두세 발자국을 뗀 뒤에야 허리를 완전히 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운동 부족인 건 마찬가진데, 이제는 진짜 몸이 늙어가는 게 느껴진다. 이 상태로는 서른 넘었을 때 골다공증 걸리는 것은 안 봐도 비디오. 이제는 다이어트나 몸매 관리 때문에 아니라, '살기 위해' 헬스장에 등록한다. 아, 그리고  맛 때문이 아니라, 건강 때문에 과일을 싸 가지고 다니면서 매일 꼬박 꼬박 챙겨 먹고, 슈퍼에서 파는 캔음료는 입에도 안 댄다.


3. 약속이 없는 금요일 저녁, 누가 어디 가냐고 물으면 친구랑 약속 있다고 말하는 것.
전에는 정말 몰랐다. 서른 세 살에 솔로인 여자 과장님이 퇴근 시간마다 약속을 확인하기 위한 전화로 늘 분주했던 이유를. 마치 다음 주에 군대라도 가는 사람처럼 매일같이 필사적으로 약속을 잡는 이유를. 
작년까진 미처 몰랐다.
전에는 금요일 저녁이라 해도 전혀 아무런 의미가 없었는데, 요새는 금요일 저녁에 약속이 없으면 남들보기 괜히 좀 뭣한것 같아 퇴근시간 즈음 누가 어디 가냐고 물으면 친구 만나러 간다는 거짓말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퇴근시간 몇 시간 전부터 치밀하게 손목시계를 힐끗힐끗보며 '약속 시간에 늦겠는데.'와 같은 표정을 짓기까지 한다. (그 과장님처럼 필사적으로 여기저기 전화해서 약속 잡는 건 아직 못하겠다.) 연말에도 마찬가지. 26살까진 남자친구가 있든 없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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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도 많지만, 귀찮아서(혹은 너무 자조적인 것 같아서. 이미 많이 자조적이기에.) 여기까지.

이렇게 쓰고 보니 온통 유쾌하지 않은 내용 뿐인데 사실 꼭 그렇게...
유쾌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특히나 여자이기에 더욱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학적으로보다는 생물학적으로.)

(동정받기 위해 글 쓴 거 아닌데 때로 진심으로 위로해주시고 동정해주시는 분들이 계시더라.
문체가 원래 씨니컬해서 그런 거니 너무 동정은 말아주세요.ㅠㅜ)



주말에 집에 있는 이유. Essay


이제는 집구석에 쳐박혀서 욕창에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안 나가게 된다.

왜냐.
친구들 만나봐야 늘 똑같은 얘기만 오가기 때문이다. (정말 특별한 친구 말고는.)

1) 남자친구 있는 친구를 만나면, 무조건 '오빠'랑 싸웠던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3년 전 것까지 다 들어줘야 한다. 
    없는 입장에서 배부른 소리 말라고 할 수도 없고, 나를 보고 위안 삼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2) 남자친구가 없는 친구를 만나면, 서로 옛 남자친구들 흉을 돌아가면서 본 후 끝에 "제대로 된 연애 하고싶다."와
    한숨으로 마무리해야 한다.
3) 남자친구가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회사 욕과 또라이 상사 욕 배틀을 해야 한다.


특히 1번과 같은 상황이 너무나 많아 곤혹스럽다.
이러니, 어쩌다 친구들하고 만날 약속이 생겨도 그냥 집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슬슬 동생 보기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우스워보일까?

날 풀리면 소개팅이나 해야겠다.

 


하이 피델리티 Book

하이 피델리티
닉 혼비 지음, 오득주 옮김 / Media2.0(미디어 2.0)
나의 점수 : ★★★★

닉혼비의 유쾌한 수다




브루스 스프링스틴 노래 속에서라면 처박혀 살다가 썩어버리든지, 아니면 도망 나가서 활활 타오르든지 둘 중 하나다. 뭐, 좋다. .... 하지만 도망갔는데도 썩어버릴 수 있다는 걸 노래한 사람은 없다. ... 도시로 나가기 위해 기를 쓰고 변두리를 떠났건만, 결국 도시에서도 엉성한 변두리 삶을 그대로 살고 있는지는 말이다. 그게 바로 나다. 그게 바로 대부분의 사람들이다. (p.149)

#1.
레코드 가게 '챔피언십 비닐'을 운영하고 있는 레코드 수집광 로브는, 여자친구 로라와의 이별을 계기로 자신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고, 인생과 미래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해본다. 그간 모아 온 수 천장의 LP판과 음악적 취향 만큼이나 자신만의 세계를 공고하게 쌓아왔던 로브. 그가 점차 세상과 소통하며 성숙해지는 과정을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있다. 그렇다고 여타 소설처럼 가슴 시린 로맨스나 뭉클한 감동 따위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런 일상 속의 위트를 사용한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남자'는 뻐드렁니에 데니스 테일러 스타일의 커다란 안경을 끼고 있었고, ... 그 또한 20대 후반임에도 부모 손에 이끌려 <하워드 엔즈>를 보러 왔다. 그는 내게서 동병상련을 느꼈기에 그 가공할 엷은 미소를 보냈던 것이다.
... 그것은 일요일 저녁 극장 앞에 줄을 서 동정어린 미소를 받는 굴욕으로부터 구해줄 사람이, 엄마 아빠와 함께 사는 영원한 싱글들의 구덩이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걸 막아줄 사람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이성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다시는 그 구덩이로 되돌아가지 않을 거다. 그런 관심을 끌 바에야 차라리 남은 평생 집 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게 낫겠다.


#2.
가끔 로브를 보면서 아니 뭐 이런 미친 놈이 다 있지? 라는 생각을 안 할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죽자사자(소설의 반 이상을 할애하며) 쫓아다녔던 여자친구 로라가 로브의 집으로 다시 들어온다. 며칠 후 로라의 아이디어로, 마리 라살의 미니 콘서트가 로브의 레코드 가게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로브는 냉큼 이런 밉살스런 고백을 한다.

그녀가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난 로라와 살고 있는 게 아니었으면 하고 바랐다. 마리와 보냈던 밤이 그보다 좀더 나았더라면 하고 바랐다. 다음 번엔(다음 기회란 게 있다면) 로라가 날 떠나도 그리 불행하지 않을 것 같았다. 마리와도 좀더 잘해볼 것이고...

로브와 그 주변인물들의 캐릭터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우스꽝스럽긴 해도 너무나 사랑스럽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에피소드들은 시트콤처럼 유쾌하지만, 삶과 죽음, 사랑과 인생에 대하여 충분한 질문과 해답을 제시한다.


#3.
자기만의 방식을 고집하면서도 세상의 통념을 완전히 무시하지 못한 채, 세상적인 기준에 미달하는 자신을 보면서, 더 잘해보려 안간힘을 써 보기도 하고, 때로는 '비뚤어져버릴 테다!'를 외치기도 하는 로브. 그는 '도시로 나가기 위해 기를 쓰고 변두리를 떠났건만, 결국 도시에서도 엉성한 변두리 삶을 그대로' 살고 있는 우리네 모습과 닮았다.

물론, 당신이 엄친딸이나 엄친아라면 절대 공감 하지 못할 이야기이다.

하지만 당신이 나처럼 신경성 위염과 장염 그리고 월요병에 시달리며 직장에 다니고 있고, '이렇게 살면 안 돼는데.'라는 생각은 늘 하면서도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하고 있으며, 그나마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재즈 피아노 레슨과 쿠엔틴 타란티노와 가이 리치의 신작 개봉을 기다리는 것이 삶의 유일한 낙인 사람이라면, 로브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쯤 변두리의 삶을 청산할 수 있을까?

 


김연아를 보면 배가 아파요.- 꼭 김연아만큼 성공해야 할까? Essay


김연아를 보면 배가 아파요.
너무 잘 나가니까. 너무 완벽하니까.ㅠ
난 쟤보다 나이도 훨씬 많은데 왜 요 모양 요 꼴일까. 하는 자괴감에 빠지죠.
(너무 당치도 않죠? 알아요. 비교할 대상이랑 비교를 해야지ㅋㅋ 어디 가서 말도 못 해요.)

 
하지만, 전 세계를 휩쓴 자기계발서들은 현대인들을 이런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합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집에서 쫓겨난 흑인 미혼모였는데 저렇게 성공했잖아.
조앤 롤링은 빈털터리 이혼녀였는데 책 한 권으로 팔자 고쳤어.
너도 할 수 있어! 누구나 할 수 있어!
지금 그렇게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야!
남들은 벌써 '시크릿'을 알고 성공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구!”

현대는 한 사람이 일생동안 이룰 수 있다고 기대되는 일들이 무궁무진한 세상이라는 겁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노력만 한다면, "누구나" 빌게이츠도, 스티브잡스도, 오바마도 될 수 있다는 거죠.

 
알랭드보통은 이런 현대사회의 ‘성공’에 대한 강박적인 시선에 대해 꼬집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진 사회적인 지위가 100% 그 사람의 "성취의 결과"를 나타낸다는 주장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동시에,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기도 합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항상, 전혀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그 모양 그 꼴'로 살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해도 되는 것일까요?

 
사실은, 돈이 없어 대학을 중퇴하고 차고에서 친구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누구나 '매킨토시'를 만들 수는 없는 거잖아요.

 
‘일상성의 발명가’ 알랭드보통이,
성공과 실패라는 상투적인 소재를 특유의 위트와 논리로 재해석하여 웃음을 선사하고 발상의 전환을 제안합니다.

직업관과 가치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무엇보다,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게다가 천하의 알랭드보통도 일요일 밤마다 월요병 때문에 베개를 눈물로 적신다니, 적잖이 위안이 되는군요ㅋㅋ)


                      <알랭드보통- 보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공 철학>



※<View subtitles>를 누르면 한글자막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오쿠다히데오의 매력이 한 풀 꺽인 소설. Book

최악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북스토리
나의 점수 : ★★★

영화 <타이타닉> 같은 소설. 책을 읽고 난 직후에는 흥분과 감동으로 가슴이 뛰지만, 시간이 흐른 후 <스무살, 도쿄>와 같은 여운이 아쉬운...


2009-01-24

 

오쿠다히데오의 매력이 한 풀 꺽인 소설.

 

 

지난 두 달간, 책을 한 권도 못 읽었다. 이사를 하는 바람에 전철로의 이동 시간이 짧아진 탓이 크지만, <스무 살, 도쿄> 이후 필 꽂히는 책을 만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앞 부분만 읽다 책장에 도로 꽂아놓은 책이 9권째가 되자, 불안감이 몰려오기까지 시작했다. 이대로 책과 영원히 멀어지는 건 아닐까.

 

이런 두 달간의 방황에 마침표를 찍게 해준 것이 오쿠다 히데오의 <최악>이다. 졸업 이후 좀처럼 볼 일이 없는 6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지만, 카피 그대로 오쿠다 히데오 특유의 속도에 가속도가 붙는흡입력 때문에, 다 읽는데는 일주일의 출퇴근 시간만으로도 충분했다.

 

<최악>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세 사람의 세 가지 인생이 등장한다. 영세한 철공소를 운영하는 마흔 일곱의 가와타니 신지로, 가출 후 파친코를 전전하는 스무 살의 날건달 노무라 가즈야, 그리고 착한 맏딸이자 국내유수의 은행 직원인 스물 셋의 후지사키 미도리. 극명하게 대비되는 이들 세 사람의 일상사가 중후반부까지 일일드라마처럼 디테일하게 묘사된다.

 

특히, 세 사람이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는 세 가지 ‘일’-철공소 사장, 날건달, 은행원-들은, 단지 한 인물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이 아니라, 모든 사건의 발단이자 원인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축이다. 그래서 세 사람의 전문분야가 디테일하고 실감나게 그려지기 때문에 각기 다른 세 편의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세 사람의 인생 곡선에 나도 모르게 쭈욱 빨려 들어가게 되는데, 이 때부터는 읽기 싫어도 끝까지 다 읽게 된다. 가속도가 붙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는 600페이지든 1200페이지든 상관이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오쿠다 히데오의 흡입력이다.

 

경제도, 사랑도, 인생도, 모든 것이 최악으로 치닫는다!”는 메인 카피를 보면, 평범했던 주인공의 일상에 갑자기 터진 최악의 사건이 주인공들을 위기로 몰아넣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것이 내가 오쿠다 히데오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한데, <최악>에서 말하는 최악의 사건은 세 사람의 일상- 철공소의 스폿용접 작업과 제조업 피라미드에서 3차 하청업체의 비애, 자잘한 절도 행각과 애정 관계매일같이 반복되는 창구 업무와 참석하기 싫지만 자주 열리는 은행 공식행사 곳곳에 숨어있다. 시간이 가면서, 늘상 있어왔던 자잘한 문제들이 함께 진행됨에 따라 서서히 불행의 씨앗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데, 그러다가 우연찮게 (세 사람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필연적이지만) 세 사람의 인생이 한 곳에서 뒤엉킨다

 

누군가의 글에서 읽은 적이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은 한 명의 사람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고. <최악> 한 권을 통해 나는 여러 명을 동시에 알게 된 느낌이다. 돈도 없고 빽도 없이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해야 할 고민을 층층이 안고 살아야 하는 우리 시대의 아버지 신지로,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십 년 가까이 이명에 시달리는 외로운 가즈야, 뭐든지 참고 이해하고 억제하며 살아가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버린 미도리. 이 밖에 불행한 인생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주변 인물들가에데, 시바타, 야마자키. 물론 이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내 가슴을 아프게 했던 인물은 신지로였다. 그는 정말 정직하고 성실하게 가정과 공장을 지키려고 한 죄 밖에 없고, 사회 구조적인 약자였다.

 

그렇다고 소설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울하고 어두운 것은 결코 아니다. 오쿠다 히데오 특유의 속도감과 치밀한 심리 묘사, 다양한 인간 군상의 통찰이 돋보였던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런 두께의 책을 전공 서적도 아닌데 독파했다는 뿌듯함도 한몫 하는 듯하다.

하지만 세 사람의 인생이 겹치는 소설의 절정과 결말 부분에서는 스펙터클한 요소를 넣어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어야만 한다는 압박감을 가지고 작품을 쓴 듯한 작위성이 느껴져 아쉽다.

  

** 책 속 한 문장 **

 

"안 좋은 일이 있다는 건 인생의 중심에 서 있다는 증거야. ... 내 나이쯤 되면 안 좋은 일조차 없어. 워낙에 갈곳이라야 병원하고 도서관하고 은행밖에 없거든. ..." (218쪽)

 

오쿠다 히데오는 항상 소설 속에 어른을 등장시켜 좌절한 젊은이에게 희망과 응원의 메시지를 던진다.



P.S 한 달 후...
앞으로는 책을 읽고 나서 한 달쯤 후에 리뷰를 쓰든지 해야겠다.
책을 읽고 난 직후에는 흥분으로 가슴이 떨려 별점을 후하게 주었었지만,시간이 지나자 내 머리 속에 이 작품이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스무살 도쿄> 때와 같은 긴 여운이 아쉽다. 오쿠다히데오, 그르지 마~요.


죽도록 미운 당신에게 편지쓰기 Book

치유하는 글쓰기
박미라 지음 / 한겨레출판
나의 점수 : ★★★

한 번쯤은 해볼만한, 내면 치유를 위한 글쓰기 가이드



2009-01-27

죽도록 미운 당신에게 편지쓰기, 내 상처와 마주하기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내 삶에 큰 의미가 있었던 한 사람으로 인한 상처 때문이었다. 지금 그 상처 자체는 많이 아물었지만, 그 때 생긴 피해 의식이 최근까지도 내 의사 결정들에 많은 영향을 미치면서 인생이 조금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는 궁금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나왔다.  '글로 어떻게 치유한다는 걸까?' '저자가 정신과 전문의도 아니던데.' '도대체 뭐하는 사람일까?' '정말 나한테 효과가 있을까?' 등등....

이 책은 한 마디로, 저자가 진행했던 집단 심리 치유 프로그램의 경험담을 담은 책이다. 제목만 보고, 글쓰기의 여러 기능 중 하나로 치유적인 기능을 강조하는 내용일 거라는 내 예상과는 많이 어긋났지만, 꽤 도움이 될 것 같긴 하다. 그러나 문학도 인문서도 아닌 '실용서'니 만큼, 읽고 깨닫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아직까지 수확은 거두지 못한 셈이다. 

저자는 가장 먼저, '죽도록 미운 당신에게' 편지 쓰기를 권한다. 나는 케이스가 조금 다르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오심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일단 내면 깊숙이 억압해놓았던 내면의 미움과 분노를 해소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함으로써 마음의 짐을 덜고, 글쓰기를 통해 분노의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방식만 조금씩 다를 뿐, '치유하는 글쓰기'는 모두 이와 똑같은 원리로 되어있다. 억눌러 왔던 내면의 부정적인 감정을 내 것으로 인정하고 글로 표현한 후, 한 걸음 물러서서 내 상처를 바라보며 근본적인 원인부터 치유해가는 것이다. 책에는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글이 예시로 많이 실려있다. 문법에 안 맞는 문장은 기본이고, 단어만 죽 늘어놓거나, 계속 같은 말만을 되풀이하는 글도 있다. 심지어 상스러운 비속어나 욕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잘 쓰고 못 쓰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면의 감정을 솔직하고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책에 실린 글들은 아주 어릴 때 겪은 가정불화나 폭력, 성폭력 등으로 인해 성인이 되어서까지 그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글이 많았다. 그에 비하면 내 상처는 애교 수준이었다. 우습지만, 이런 이유로도 사실  큰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소그룹 프로그램의 방법론을 소개하고 있는 만큼, 실제로 혼자는 할 수 없는 일들도 많다. 소그룹의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 정기적으로 만남을 갖고, 온라인에서 글과 댓글을 통해 서로 소통하면서 안으로 꼭꼭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조금씩 세상을 향해 여는 연습을 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책에서 치유는, 글쓰기 그 자체를 통해 이루어지기 보다, 깊은 상처를 여러 가지 형식의 글을 통해 표현하고, 그것을 온라인에서 타인과 공유하고 공감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다보니 이 책에 의하면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결국 저자의 치유하는 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스스로 그런 소그룹을 만들어야 하는 것인데, 그러기엔 현실의 벽이 너무 높다. 그런 방법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이 책을 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앞서 소개한 편지쓰기 등의 글쓰기는 충분히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고, '셀프인터뷰:나에게 나를 묻다' '떠나보내기' '핵심가치 찾기' 같은 것들은 치유를 위해서 뿐 아니라 창의성을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꼭 해볼만한 흥미로운 글쓰기 방법인 것 같다. 나도 이제 내 상처와 용기있게 마주보는 연습을 해야겠다.

속지 말자, 목차빨. 다시 보자, 표지빨 Book

27살 여자가 회사에서 일한다는 것
전미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나의 점수 : ★★

이 책을 사 읽을 바엔, 옆 자리에 앉은 대리님에게 술을 사달라고 해라.


2008-11-20

속지 말자, 목차빨. 다시 보자, 표지빨.


내 나이 스물 여섯(이 책을 읽었을 당시에는 그랬다. 새해에는 딱 스물 일곱이 되었다.).
직장생활 1년차.

15개월 가량 직장생활을 하면서 뼈아프게 느낀 것은, 직장생활에 있어서 업무적인 능력이 30이라면, 조직문화에 적응하는 능력이 70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직급이 높아질 수록 달라지겠지만.) 또, 내가 아무리 똑똑하고 열정이 많다고 큰 소리 쳐도, 학교 다닐 때 동아리며, 학회에서 단체 생활을 성공적으로 해왔다고 잘난 척을 해도, 군대 생활을 했던 남자들의 조직 융화력을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것.

저자의 말마따나, 회사문화, 조직문화는 남자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남자들에게 익숙한 문화다. 그러니 여자에겐 생소하고 힘들 수 밖에 없다. 잘 하고 있다, 싶으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펑, 이번엔 나아졌겠지, 싶으면 또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펑펑 터지는 총칼없은 전쟁터 같은 곳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작년 11월,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나는, 회사라는 조직의 냉혹함(?)에 다시 한 번 한기를 느끼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랬다. 나는 정확하게 이 책의 코어 타겟이었던 것이다. 목차를 보니 완전히 나를 위해 쓰여진 것 같았다. 그래서, 예전에 전미옥씨의 <성공하는 여자의 자기경영노트>에 대실망을 한 적이 있으면서도 '미워도 다시 한 번' 장바구니에 책을 담았던 것이다.

 또, 머리를 하나로 묶고, 내가 아주 즐겨하는 자세인 책상 다리를 하고 사무용 의자에 앉아 야근(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이 표지를 보고 야근을 떠올릴 것이다.)을 하는 젊은 여성의 모습에 완전한 동질감을 느껴, 구매하기 버튼을 망설임없이 눌렀던 것이다.

각설하고, 이 책은 목차가 다인, 누구나 다 아는 당연한 내용만을 모아 만든 책이다.직장생활을 안해 본 사람도 상식만 가지고 이 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내 직장 생활이 보통 사람들보다 17배쯤 혹독해서, 지난 1년여동안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거나. )

 나와 같은 고민으로 힘들어하며 이 책에 SOS를 치고자 하는 직장인 여성이 있다면, 이 책을 사 읽는 대신, 차라리 옆 자리에 앉은 대리님에게 술을 사달라고 해라. 그게 어느 모로 보나 107배 효과적이라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아니면 다른 훌륭한 처세술 책을 찾아 보거나.) 하지만, 직장생활의 어려움에 대해 또래 친구들끼리 모여 넋두리나 하고 있을 바엔 이 책의 목차를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무료니까.


아직 덜 큰 어른들을 위한 위로 Book

쿨하게 한걸음
서유미 지음 / 창비(창작과비평사)
나의 점수 : ★★★

학창시절 ‘그 나이쯤 되면 이러이러한 정도는 되어 있겠지’ 했던 기대가 모두 무너져버린 지금, '너만 그런 게 아니야'라고 등을 토닥여주는 사촌 언니 같은 소설.


2008-11-30

아직 덜 큰 어른들을 위한 위로   


독자들이 평소 느꼈지만 말로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들을 글로 '대신' 표현하는 것이 좋은 소설의 조건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나 역시 그 동안 그런 소설들에 아낌없이 별점을 주어왔다. 좀처럼 읽지 않던 한국 소설, 그것도 나와 세대가 거의 같은 30서유미 작가의 소설을 택한 것도, 정리되지 않은 나의 이 혼란한 시기를 소설을 읽으며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쿨하게 한걸음>100% 공감 가는 현실적인 소설이다. 이제 막 서른 셋이 된 연수는, 나와 7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성격과 모든 상황적 조건들이 나와 심하게 닮았다. 집안 분위기와 가족 관계까지도.

 

학교 다닐 때 그 나이쯤이면 이 정도는 되어 있겠지 했던 바로 그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지위나 명예는 커녕, 통장 잔고조차 얼마 없다는 것,부모님은 하루하루 약해지시고 늙어가시는 게 눈에 보여 안타까운데, 모아놓은 돈이 있나, 번듯한 직장이 있나, 그것도 아니면 든든한 사윗감이 있나, 큰 딸로서 부모님 기 펴드릴 일이 없어 마음이 늘 불편한 것. 하지만 표현은 결코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 학창시절에 공부 꽤나 했고, 이것저것 관심도 많고 아는 것도 많았지만 결국 쥐꼬리만한 월급 받으며 불안정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학창시절에 성적은 늘 바닥이었어도, 착한 외모를 타고나 일찍부터 '연애'계에 뛰어든 친구가 지금 돈 많은 남자 만나 떵떵거리며 사는 걸 보며 패배의식을 느끼는 것, 돈 잘 벌고 시집 잘 가 엄마 호강시켜주는 엄친딸과의 비교에 엄마와 한바탕하고 방에 들어와 문 닫고 훌쩍이는 일 등.

 

우리 주변, 아니 내 주변에서 늘상 일어나는 일들과 내가 늘 생각하는 것들을 소설은 놀라울 정도로 디테일하고 실감나게 재연해내고 있다. 콩 외엔 아무것도 넣지 않았습니다.라는 어떤 유제품의 광고 카피 대신'현실 외엔 아무것도 넣지 않았습니다. 라는 카피가 떠오를 만큼.

 

주인공 연수가 지적했던 대로 보통 영화나 소설 같으면 로맨스가 피어 올라야 할 딱 그런 상황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주인공을 힘들게 했던 생각 없고 운 좋아 잘 살게 된 친척들이 마지막에 가서 불행해지거나 혹은 알고 보면 불행하게 살고 있었다느니, 하는 권선징악적 장치도 없고, 뒤늦게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주인공이 결국은 꿈을 이룬다는 상투적인 엔딩도 <쿨하게 한걸음>엔 없다. 이 점이 무척 마음에 든다. 드라마틱하고 임팩트 있는 요소가 한 두 개쯤 있긴 해야 한다는, 작가로서 뿌리치기 힘든 유혹을 모두 이겨낸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소설이 우리들의 현실을 심하게 잘 반영한 탓에, 소설은 내가 정리하지 못한 혼란스러운 현실 또한 혼돈스러운, 정리되지 못한 모습 그대로를 그려내고 있다. 결국, 내가 정의 내리지 못한, 피터팬과 웬디의 경계에 서 있는 의 인생, 의 꿈, 의 미래를 정의 내리는 일은 작가가 아난 바로 나 자신이 해결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당신의 젊음에게 건배! Book

 무 살, 도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나의 점수 : ★★★★

코믹한 스토리에 신나게 웃다보면, 어느덧 인생과 꿈에 대한 성찰에 도달해있게 만드는 오쿠다 히데오의 재주!


2008-11-13

당신의 젊음에게 건배!   

  
<스무살, 도쿄>는 유쾌하다.
독자들이 일반적으로 청춘 소설에 기대하는 풋풋하고 유쾌한 에너지들이 노련하고 명쾌한 문장을 통해 뿜어져 나온다. 총 여섯 개의 연작 소설로 구성된 <스무살, 도쿄>는 굉장히 흥미로운 구성을 취하고 있다. 히사오가 재수학원에 다니기 위해 홀로 도쿄로 상경한 20살 봄부터, 슬슬 인생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하는 29세 겨울이 이 소설의 배경인데, 여섯 장의 챕터가 각각 다른 해의 하룻동안 있었던 일을 그리고 있다. 이를 테면, 대학교 새내기 시절 중 하루, 도쿄로 상경한 날 하루, 광고 대행사 말단 시절의 하루, 광고 대행사 중간 관리자 시절의 하루 등등- 그 하루 하루의 에피소드를 통해 히사오의 20대 전체를 섬세하고 생동감 있게 조명해내고 있는 것이다.

 <스무살, 도쿄>와 느낌이 비슷한 소설로 무라카미 류의 <식스티 나인>이 생각난다. 젊은 날의 꿈과 방황, 어른이 되기 위한 소년의 성장통을 코믹하고 속도감 있는 사건 전개를 통해 그렸다는 점이 비슷하다. 하지만 주인공의 캐릭터에서는 분명 차이가 난다. <식스티 나인>의 주인공 켄이 무조건 일을 저질러놓고 보는 전형적인 골목대장 스타일이라면, <스무살, 도쿄>의 히사오는 나름대로  생각도 깊고 주관도 있지만, 소심하고 귀가 얇아 남의 시선 하나 하나에 신경을 굉장히 많이 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이다.


"창에 비친 스스로에게도 만족했다. 차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옷차림과 비교해도 결코 처지지 않았다. 문 가까이에 서 있는 여자애는 이따금 이쪽을 쳐다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아니, 틀림없이 보고 있을 것이다.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 시부야 역에서는 시퍼 룩 차림의 젊은 애들이 잔뜩 올라탔다. ....약간 압도되었다. 다들 패션 잡지 <뽀빠이>의 모델처럼 세련되었다. 아니, 나도 그들 못지않다. 어째든 JUN의 헐렁한 배기바지인 것이다

 "화제의 <스타워즈>가 개봉되면 누구보다 먼저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향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자. 자연스럽게 언급하는 게 좋겠지. 아참, <스타워즈>를 봤다. 뭐, 그럭저럭 재미있더라, 하는 식으로."


 길에서 만난 같은 나고야 출신 아저씨가 음악 평론가가 되고 싶다는 다무라에게 했던 말이, 마치 나에게 하는 말인 것 같아, 한 동안 뇌리에 남아있었다. 어쩌면 우리 아빠뻘되는 오쿠다 히데오가, 이 책을 읽는 자신의 아들, 딸뻘 되는 젊은이들에게 정말 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젊은 놈이 평론가 같은 거 되어서 뭐해? 저기 객석에 앉아서 남이 하는 일에 이러쿵저러쿵 토를 다는 건 노인네들이나 하는 짓이야. 젊은 사람은 무대에 올라가야지! 못해도 상관없어, 서툴러도 상관없다고. 내 머리와 내 몸을 움직여서 열심히 뭔가를 연기하지 않으면 안돼! ....... 젊다는 건 특권이야. 자네들은 얼마든지 실패해도 괜찮다는 특권을 가졌어."


 


염세주의자들로부터 배우는 낙천적 삶의 자세 Book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나의 점수 : ★★★★

앞으로 닥칠 인생의 고통과 좌절을 우리가 어떠한 태도로 받아드릴 것인가에 대해 우리보다 먼저 고민했던 철학자들의 인생 이야기


2008-10-25 

염세주의 철학자들로부터 배우는 낙천적 삶의 자세 


"리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이 책이 정말로 어렵고 지루했기 때문에 더 이상 드 보통의 팬으로서의 자격이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3장 좌절에 대한 위안(세네카)’을 읽을 때까지만해도, 나는 리뷰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끝까지 읽은 나는 지금도 여전히 드 보통의 팬일 뿐 아니라, 더욱 빠져들게게 되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로부터 ‘위안’ 정도가 아니라 거의 ‘구원’을 얻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고 낙심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일까. 

The Consolations Of Philosophy라는 원제를 가진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의  제목은, 많은 독자들이 지적하듯, 책의 실제 내용과 거리감이 많이 느껴진다.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라는 부제 또한 마찬가지다. (초판본의 제목이던 <드보통의 삶의 철학산책>이 그나마 제일 낫다.) 이 책은 그렇게 가볍고 유쾌한 철학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삶 가운데 느꼈던 혹은 앞으로 닥쳐 올 고통과 좌절을 우리가 어떠한 태도로 받아드릴 것인가에 대해 우리보다 먼저 고민했던 철학자들의 삶과 이론을 통해 교훈과 위안을 얻기 위한 다소 심각한 철학 에세이인 것이다.

인기 없음에 대한 위안(소크라테스), 충분한 돈을 갖지 못한 데 대한 위안(에피쿠로스), 좌절에 대한 위안(세네카), 부적절한 존재에 대한 위안(몽테뉴)에서는 마음의 위안을 주는 내용이라기 보다는 '쉽게 읽는 철학 이야기' 쯤으로 느껴진다. 여기까지는 앞서 말한 것처럼 드보통의 전작들을 생각했을 때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불쑥불쑥 든다. 하지만 점차 드보통 특유의 재기발랄한 문장에 웃음도 짓게 되고, 마음 깊이 공감도 하게 되고, 철학적 통찰에 감탄도 하게 되는데, 이 빈도수가 뒤로 갈수록 느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상심한 마음을 위한 위안(쇼펜하우어)'과 '곤경에 대한 위안(니체)'에서 이 염세주의자들은, 사랑에 실패한 이들과 곤경에 빠진 이들에게 '본의 아니게' 큰 위안을 안겨주는데, 여기서 '본래 가장 염세적인 사상가들이 가장 쾌활할 수도 있다'는 드 보통의 말에 200% 공감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고 울고 있는 이들과 인생이 고통스럽다고 호소하는 이들 앞에 서양 철학의 거장들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나타나 이렇게 말해주는 것보다 더 큰 위안이 어디있겠는가? 

 "너 그 멍청이하고 안 헤어졌으면 행복했을 거 같니? 그건 완전한 착각이야. 절대 그럴 수가 없어. 이렇게 생각하는 멍청한 인간들이 많은데 말야. 사실 사랑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거든. 니가 그 놈이랑 헤어진 건, 니가 매력이 없어서도 아니고, 그 놈이 잘 나서도 아니고 니네 둘이 헤어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린 자연의 섭리야. 하지만 슬프다면 마음껏 슬퍼해. 그게 정상이니까. (쇼펜하우어)" 

"살다보면 불행한 일이 생기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 고통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이고,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는 거야. 이렇게 질질짜고 있을 때가 아니야, 지금. 이런 고통들은 인생의 필수 코스고, 더 중요한 건 니가 이걸 어떻게 이겨내느냐 라는 거라니까. (니체)"
이렇게.

나는 이제 니체에 대해 더 알고 싶어져서, 니체의 저서들을 당장 사 볼 생각이다. 물론 드 보통 같은 안내자없이 섣불리 덤볐다가는 몇 년간 내 책장 한 구석에서 장식품으로 쓰여질 확률이 크지만.


"만약에 어느 음악가가 한 음색만을 좋아한다면 어떤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음악가는 모든 음색을 활용하여 조화를 일궈낼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역시 삶을 구성하는 선과 악을 가지고 그렇게 요리할 수 있어야 한다." -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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